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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원 죄목 자살 티셔츠 동거녀 근황 전씨 영화 장경장 전과 책

이슈모와 2020. 11. 18. 02:00

신창원 죄목 자살 티셔츠 동거녀 근황 전씨 영화 장경장 전과 책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신창원에게는 가난도 고통스러웠지만 어머니가 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은 참기 어려운 슬픔이었다. 만약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해 주셨더라면 이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을 속였다는 이유로 신창원을 때렸고 결국 계모까지 들어왔습니다. 계모는 신창원 여동생이 아픈데도 아무 관심이 없었어요.

그가 범죄자가 된 계기는 그의 저서에 남양국민학교 5학년 때의 선생님으로부터 아이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하러 학교에 가나요. 빨리 사라진다"라는 폭언을 들고 자신의 마음 속에서 악마가 태어난 것을 느끼고 어둠을 갖게 됐다는. 결국 학교생활에서도 학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던 신창원은 초등학교 때부터 가출을 시작했고 결국 중학교에 진학한 지 3개월 만에 퇴학당했습니다

 

21세기에 인권 존중을 어느 정도 받고 초중등 교육을 마친 세대의 눈에는 세상에서 엉뚱하고 조악한 쓰레기 같은 교사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믿지 못하고 그저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거짓말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당시에는 만화 검정 고무신이나 소설의 흰 종이 수염처럼 어디에 쓰이고 있는지 모르는 이런 잡다한 납입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장 교감 같은 비싼 사람들이 아이를 엄하게 가르치면 강하게 자랄 수 있다는 구실로 담임에게 돈을 가져오지 않은 아이들을 때리라고 하거나 심지어 모욕감이 많았다고 위협했다. 인권의식이나 시민의식이 낮았던 당시의 시대 분위기도 한 몫을 했습니다

 

우한 가정환경과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들은 폭언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는 신창원이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지게 했고, 어려운 형편을 위해 남의 밭과 가게에서 음식을 훔쳐 먹고 동네에서 닭, 수박 서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 도둑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달리기가 빨라서 도망가면 아무도 잡을 수 없었다고 마을 사람들이 전하고 있습니다. 무작정 도망치지 않고 가까운 나무 위에 올라가 숨어 추적자의 동향을 살피기도 했죠.

그리고 경찰서에 끌려간 것이 14살 때였습니다. 어느 날 좀도둑질을 했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신창원을 범죄자의 수렁에서 구해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창원의 아버지는 아들의 버릇을 고쳐주겠다고 했고 경찰관도 훈방 조치한 신창원을 데려와 소년원에 들여보내달라고 부탁해서 체포했어요. 아버지의 의도가 정말 좋은 뜻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때문에 신창원의 삶은 망가졌어요. 소년원에 다녀온 것을 계기로 감옥에 한 번씩 들어올 때마다 그의 범죄는 날이 갈수록 대담해졌고 결국 강력범죄까지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신창원은 어릴 때부터 자주 싸웠어요.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고, 갖고 싶은 것은 꼭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어요. 복싱을 배우자마자 남의 싸움에 끼어들었어요. 한 번은 사람을 심하게 다치게 한 적이 있었는데 합의금이 없어 후배들과 함께 돈을 가진 행인을 협박해 돈을 빼앗기기도 했다.

 

이후 서울에서 고향 선후배 4명과 공모해 슈퍼마켓과 금은방 등에서 강도 행각을 벌인 끝에 1989년 3월 28일 주범 김양훈이 문구점을 운영하는 피해자를 살해했습니다. 다른 일당 4명은 4월 1일 체포됐지만 신창원은 총상을 입고 도주에 성공해 반년 만에 체포됐습니다.

이후 강도살인치사죄로 무기징역을 받고 경북북부 제2교도소에서 복역합니다.

1994년 부산교도소로 이감돼 복역하다 1997년 1월 탈옥했습니다. 노역 작업 도중 손에 쥔 작은 실톱날 조각으로 하루 20분씩 무려 4개월 동안 들키지 않으려고 화장실 쇠창살을 몰래 조금씩 당겼고, 마침내 지름 1.5cm 쇠창살 2개를 자른 뒤 감방을 빠져나와 외벽 환기통을 타고 1층으로 내려왔습니다. 철창으로 20m가량 떨어진 교도소 내 교회 신축공사장 철벽 아래 언 땅을 폭 53cm, 깊이 20cm가량 파내 공사장에 들어간 뒤 공사장에서 주운 밧줄을 타고 외부로 통하는 공사장 담장을 넘어 교도소를 빠져나왔습니다.

도망치는 데 약 1시간 30분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미리 동료 죄수를 유인했습니다.또는 교도소 묵인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설이 제기될 정도로 신출귀몰한 탈출이었다. 이 탈옥을 위해 좁은 곳을 통과하기 쉽도록 15kg을 감량하고, 신뢰를 쌓으며 감시를 줄이기 위해 오랫동안 모범수로 지냈다고 합니다. 교도소를 빠져나온 신창원은 500m 떨어진 화훼농가에 침입해 옷을 훔치고 자전거를 훔쳐 4km를 달려 구포사거리까지 간 뒤 택시를 타고 서울로 잠입했습니다.

이후 2년 6개월 동안 약 4만 km를 도주했고 도주하는 동안 빈집을 털며 훔친 현금으로 생활했으며 이동수단도 훔친 차량을 이용했다. 그렇게 도망다니는 동안 붙잡힐 뻔하면서도 체포 직전 경찰관들의 추격을 피한 것만 무려 6번이나 됐죠. 연인원 97만여 명이 동원되고 전국 6개 지방경찰청에 수사본부가 차려지는 등 거의 전국을 돌며 도주 행각을 벌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천안시 인근에 자주 출몰하는 바람에 천안 시내 곳곳에 경찰관이 배치되고 차량 검문이 실시돼 천안시민들이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천안 말고도 다닌 곳이 많아 이곳저곳에 해당 지역 경찰서 어른들이 날아갔습니다. 당시 신창원 검거 실패로 징계를 받은 경찰관은 29명, 총경 이상만 10명이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당시 복무하던 전의경에게도 악몽으로 기억됐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화성연쇄살인사건과 마찬가지로 경찰관의 진급정체를 해소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또 이때 진급한 김석기 등이 나중에 서울지방경찰청장까지 승진하게 됩니다.

이렇게 신창원은 방송을 통해 전국구급차로 알려지게 됐고, 현상금이 1,000만원에서 5,000만원을 넘었습니다. 이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사상 최대의 현상금으로 2011년까지 매년 산불을 피우던 방화범, 일명 봉태산 불다리벌레에게 현상금 3억원이 걸리기 전까지 갱신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014년 유병언이 현상금 5억원으로 기록을 갈아치웁니다.

"1999년 당시의 5,000만원은 단순한 소비자 물가지수의 가치 환산으로도 2018년 기준으로 약 8,000만원이고, 최저 임금으로 산정해보면 1999년 최저 임금은 시급 1,600원이므로 시급 7,530원이었던 2018년에는 약 2억3,500만원, 당시 대치동 은마아파트 35평형이 1억5천만원에 매매되던 시절이었으므로 매우 큰 현상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별별 천태만상이 나왔는데 신창원이 나타난다는 사전 첩보를 입수하고도 혼자 공격하려고 단독으로 검거를 시도하다 실패해 징계를 받은 형사가 있는가 하면 잠복근무를 하던 형사가 신창원 동거녀를 성폭행해 결국 파면되고 구속되지 않거나 신창원 관련 신고를 받고 천신만고 끝에 검거했지만 사실 신창원을 사칭한 강도범인 경우도 있었다. 가장 압권은 시민의 신고로 검거된 상태에서 경찰관의 부주의로 놓친 것이 있었는데, 이번엔 현상금을 주겠다고 경찰이 협박해오다 신고자가 소송을 내고 대법원까지 끌고 가 5,000만원을 몽땅 타낸 것입니다. 이렇게 신창원에 대한 현상금은 두 차례 지급되었습니다.

이에 신창원은 경찰관의 다리를 피격당하고도 도망쳤고, 경찰관과의 격투 중 부러진 뼈를 혼자 맞기도 했습니다. 추격이 심할 때는 쥐를 잡아먹으며 박스 안에서 일주일 이상 몸을 숨기기도 했습니다.

여담이지만 그는 문신이 있는 아무리 별 변장을 해도 문신을 지울 수 없어 문신을 감추기 위해 한여름에도 긴팔 티셔츠를 입고 자주 활보했다고 합니다. 이는 그의 결정적인 단서를 확보하는 데 쓰일 것입니다.

 

신창원 곁에는 항상 여자가 있었어요. 검거 당시 신창원은 전북 익산시 은하수카페 직원 김모 씨와 동거하면서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6월 29일 김 씨는 전남 순천시로 가서 대주파크빌을 계약하고 다음 날부터 바로 집안일을 시작했다. 신창원은 이때 김씨에게 돈다발을 보여줬다가 다짜고짜 나를 배신하지 말라고 협박하는 등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7월 16일 신창원이 검거되자 김 씨는 이런 사정을 털어놓으며 아파트는 내 이름으로 계약했으니 빼앗으면 안 된다고 경찰에 부탁했다. 김씨에게 중요한 것은 신창원과의 사랑이 아니라 돈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창원은 자신을 숨길 여자가 필요하고 여자는 돈이 필요해 이해관계가 나빠진 게 '신창원의 여복'이었던 셈이죠. 물론 신창원도 여자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도피처로 이용한 것이기 때문에 각자의 이익을 위한 필요관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999년 7월 16일 전남 순천시 금당 대주아파트 104동 205호에서 가스레인지 수리공 김모 군은 당시 우연히 의뢰된 집을 수리하던 중 신창원을 봤지만 신창원인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그 집에 들어가 남자 얼굴을 확인하고 경찰서에 신고한 뒤 심지어 부동산에 들어가 그 집이 여자 명의인지 확인까지 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집을 계약한 다음 날 입주한 사실을 알고는 신창원임을 확신했다고 합니다. 대부분 이사를 하려면 계약을 하고 며칠 후 돈을 내고 들어오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검거될 당시 입었던 미소니트 셔츠가 화제가 되면서 한때는 그 꽉 끼는 티셔츠가 신창원 티셔츠로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검거된 후 징역 22년 6개월이 추가되어 그는 흉악범을 감금하는 청송교도소 2.6m의 독방에 수감되었습니다

 

청송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신창원은 공부를 시작했고 2004년 고입, 대입 검정고시에 잇따라 합격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탈옥사건 이후에는 모범수로 지내는 것 같아요. 일찍이 개신교에 귀의했습니다만, 개신교 측의 문제로 배교한 것 같습니다.

 

2010년 6월에 강력범을 수감하는 청송 2교도소에서 일반교도소 제1교도소로 이감되었다고 하며, 상담사 자격을 목표로 감옥 안에서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다고 합니다. 2011년 현재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학사학위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감옥에서 주고 받은 편지를 보면 매우 논리적이고 지적인 글과 내용이 인상적입니다. 법을 공부해서 국가와 교도소장을 상대로 4건의 소송을 제기했는데 승소했어요.

2011년 8월 18일 감방에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시도의 이유는 한 달 전 아버지를 잃은 데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합니다. 신창원은 복역 초기에는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았지만 다시 감옥에 간 뒤 그를 찾아온 것은 아버지뿐이었다고 합니다. 신창원은 심각한 저산소증으로 상당히 위독했으나 얼마 뒤 의식을 회복해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보도가 계속됐으나 뒤늦게 발견되면서 뇌 손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2011년 8월 22일, 그가 올해 1월 한국의 교도소 행정에 대해 강한 불만을 나타낸 편지를 자치경찰연구소 문성호 소장에게 보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관련 뉴스의 문 소장은 이 때문인지 아버지의 죽음보다 장기수에 대한 절망적인 수용 실태 때문으로 추측된다고 말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현재 그 사이에 존재했던 유영철, 강호순, 정남규, 정두영, 조두순 등 흉악범이 등장했고, 최근 신창원 탈옥 사건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 선두주자는 표창원이었고 신 씨의 요지는 한마디로 신 씨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법원이 처벌을 그렇게 감정적으로 하면 돼요? 그 조두순도 12년형밖에 복역하지 않았는데 잘 도망갔다는 이유로 22년 6개월 증형이 타당한가요.라고 정리를 해 줄 수 있습니다. 신창원이 도망친 것은 무능한 경찰관들이 반성하는 것인데, 이들이 반성하는 대신 신창원을 엄벌하는 것은 도망간 네가 나쁘다며 괘씸죄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냐는 시각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탈옥사건 이후에도 교도소 수감기간 동안 큰 문제없이 학업에 열중해 세상을 더욱 놀라게 하는 것으로 보아 모범적으로 수감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범법자들과 달리 신 씨에게 더 동정과 애틋하다는 의견이 대다수이고, 신 씨의 어린 시절 어른들의 따뜻한 보살핌이 있었더라면 신 씨의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의견과 심지어 가석방으로 풀려나면서 사회에 봉사할 기회를 달라는 일부 의견도 있습니다.

다만 비판자들은 밀레니엄을 전후한 시대와 2010년대의 시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2010년대보다 형이 엄격하게 선고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이를 2010년대의 시각으로 평가하는 건 무리한 처사입니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고도 강도 사실이 드러나면 최대 사형이나 징역 22년 6월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실제로 사형이 구형되기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어차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니까 사형당하는 게 아니라면 추가 형량을 아무리 선고해도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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